Silk Wave Mission 칼럼
카라바흐 사태를 위한 기도 :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살아야 한다’ 터키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카라바흐 위기에 대해 말하다
카라바흐 사태를 위한 기도 :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살아야 한다’ 터키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카라바흐 위기에 대해 말하다
카라바흐 사태를 위한 기도
- 카라바흐 지역에서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모든 무력충돌과 갈등이 바로 그치게 하소서
- 카라바흐 사태에서 아제르바이잔에 군사 원조를 하는 터키 정부의 모든 가담이 속히 중단되게 하소서
-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의 복음이 카라바흐 사태 가운데 있는 모든 영혼들에게 편만하게 전파되게 하소서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살아야 한다’ 터키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카라바흐 위기에 대해 말하다
글: 에브림 케페넥 (BIA 뉴스 데스크 / 2020.10.01)
터키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주로 이스탄불에 산다. 그들의 인구는 4만 명으로 추산된다. 과거에는 더 많은 아르메니아인이 이 땅에 살았다.
터키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의 긴장에 어떤 영향을 받고 있을까? 우리는 아고스 신문의 파크랏 에스투캰, 아라스 출판사의 로베르 콥타쉬, 그리고 작가 자클린 첼릭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터키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의 긴장에 어떤 영향을 받고 있을까? 우리는 아고스 신문의 파크랏 에스투캰, 아라스 출판사의 로베르 콥타쉬, 그리고 작가 자클린 첼릭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디아스포라와 “신실한” 아르메니아인
자클린 첼릭: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의 긴장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터키가 폭력을 조장하는 세력으로 개입하는 것은 두렵습니다. 터키 정부는 형제 국가와 연대할 때마다, 아르메니아인들을 표적으로 삼아왔습니다.
현재는 터키가 아제르바이잔의 모든 역동성을 앞지르고 전쟁의 최전선에 서 있는 모습입니다. 며칠 동안 편파적 언론은 아침 프로그램과 저녁 뉴스를 포함한 미디어에서 증오와 혐오를 표현했습니다. 그들이 ‘형제의 자격’으로 이 일들을 하는 동안, 언론은 이 나라에 살고 있는 모든 아르메니아인들을 표적으로 만듭니다.
아시다시피 터키와 전 세계에는 ‘터키에서 아르메니아인으로 사는 것’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터키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신실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충성심은 위협을 무릅쓰는 것에 대한 명예적 표현입니다.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위협은 공식 담론에 의해 촉진되는데, 디아스포라는 인정할 수 없는 외부 세력이고, 아르메니아는 이해하기 어려운 ‘테러의 나라’라는 체계 안에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담론의 근원은 1915년에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세 가지 이유에 대한 반영으로 터키는 다음과 같은 반응을 부채질해왔고 이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내가 죽이지 않았다고 말할 때까지 나는 너희를 죽일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사건을 이끄는 정치인들은 디아스포라가 이곳 아르메니아인의 일부이며, 그들이 무시하고 없애려고 하는 아르메니아 국가 또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나라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에 대해 누가 달리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곳 아르메니아인들은 언제나처럼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쿰카프 거리는 이틀 전부터 온갖 파시즘적인 구호를 내걸고 공격을 감행할 태세를 갖춘 아제르바이잔 깃발을 단 차들과 폭도들이 점령하고 있습니다.
쿰카프의 아르메니아인들과 섬들을 포함한 다른 이스탄불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정치적 언어의 구덩이 속에 갇혀 있습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이 사람들의 죄는 무엇일까요? 전쟁에서 태어난 젊은 아르메니아 군인과 아제르바이잔 군인들의 죄는 무엇일까요? 현재 터키는 1915년까지 소유하지 않았던 곳을 위해 다시 한번 젊은이들을 희생시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전쟁으로는 소유할 수 없습니다.
터키와 전 세계의 아르메니아인 중 누구도 피를 흘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르메니아인들은 피와 함께 후대에 남겨진 유산을 알고 있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터키 청년이 피를 흘리면 터키 사회 전체가 피를 흘리는 것과 같습니다. 쿠르드 청년이 피를 흘리면 쿠르드 사회 전체가 피를 흘리는 것과 같습니다. 아르메니아 청년이 피를 흘리면 아르메니아 사회도 이러한 억압의 한가운데서 피를 흘립니다. 터키, 디아스포라, 아르메니아에 있는 모든 아르메니아인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작가로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의 형제들도 이같이 생각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똑같이 피를 흘린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전쟁과 미움의 언어는 좋은 담론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있기 위해 숨을 내쉬어야 합니다.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서 말입니다.
민족주의에 잠식된 이성
로베르 콥타쉬: 터키의 몇몇 이슈에 관해서는 대중들이 매우 빠르게 공식적으로 모이는데, 특히 아르메니아인들과 쿠르드족에 관한 이슈에 그러합니다. 절대적인 편견이 존재하며 아무도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사안의 세부사항 혹은 그 문제의 인도주의적 측면을 보지 않습니다. 여론을 조성하는 권위 있는 기관이나 개인이 무언가를 말하면 언론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것을 바탕으로 담론을 전개합니다.
예를 들어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들은 국제법에 의해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거의 30년 가까이 사실상의 국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마치 그들이 ‘침략’ 운동을 시작한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아무도 “왜 지금, 왜 오늘이지?”라고 묻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것이 역사적으로 어디에서 왔는지 보지 않습니다.
아르메니아 측의 첫 번째 공격은 순식간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진실이 되어버렸지만, 언론인을 포함한 그 누구도 이것이 사실이었는지 살펴보지 않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이 먼저 불을 질렀다 하더라도 아제르바이잔군이 수백 킬로미터의 연락선을 따라 어떻게 전면 작전을 개시했는지, 그에 대한 어떤 대비가 필요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았습니다. 객관적으로 보이는 대부분의 언론인들조차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일부 존경받는 작가들조차 맹목적 애국주의적 환경을 무시한 채 이들 사건을 둘러싸고 나라에 강한 반전 (反戰) 분위기가 있는 것처럼 '비현실적인 반전 정서'에 대해 비판했습니다. 또한 90년대 초 행해진 호잘리 대학살을 떠올리며 평화를 수호하는 자들을 무력화시키며 불길을 부채질했습니다.
터키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이미 수십 년 동안 내면화된 공포를 느끼고 살아왔고, 공포감은 긴박한 시기에 더해집니다. 그리고 이것은 피해망상적인 공포가 아니라 많은 역사적 사례와 현재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터키는 마치 전쟁이라도 한 것처럼, 이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있었던 것처럼 반응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와 같은 어족인 아제르바이잔과의 역사적, 문화적 유대감”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제르바이잔 문화와 그 민족에 대해 많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든 사람들이 터키인과 아르메니아인 사이의 더 깊고 계층화된 문화적, 다양한 유대관계를 잊고, 혈통과 인종을 바탕으로 이 문제를 보기 시작합니다. 결과적으로 터키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집 안에서조차 불안하고, 안절부절못하며, 두려운 감정을 느낍니다.
심지어 글을 쓰는 소수의 아르메니아인 우리조차도 문제를 피하고자 조심스럽게 말하고 쓰는 것에 대해 서로에게 경고합니다.
쿰카프에서 자동차와 깃발을 앞세운 퍼레이드는 이미 (이 사람들의 진짜 고향인) 터키에서 어려운 환경 안에 살고 있는 아르메니아 이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매우 무서웠습니다. 특히 1955년의 포그롬과 같은 집단 학살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시위가 어떻게 불같이 번져나갈 수 있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거리 시위는 당국의 승인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아마도 그들의 힘을 조금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지만 이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며 누구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터키는 카프카스를 위한 정책을 펼치겠지만, 제3자로서 중재 역할을 했다면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는 문제에서 그런 전사적 입장을 갖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정부가 적이 없으면 안되고, 끊임없는 긴장의 정책을 유지해야 하며, 안팎으로 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는 나라 전체가 그 분위기에 너무 쉽게 빠져들고, 심지어 반체제 인사로 보이는 사람들까지 공식 입장에 맞춰 편을 든다는 것은 민족주의에 의해 야기된 이성의 잠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사람들의 헛된 죽음
파크랏 에스투캰: 우리는 극도로 불안한 과정에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화가 납니다. 이 과정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조직적인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2주 전 아르메니아 외무장관은 “지하디스트들이 이 지역에서 준비하고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언론에서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카라바흐에 PKK 캠프가 있다”라고 보도했습니다. 오늘 지하디스트들은 카라바흐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헛되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매우 화가 나고 유감스러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