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k Wave Mission 칼럼
남아프리카 모라비안교회 지도자 마그다레나의 이야기
남아프리카 모라비안교회 지도자 마그다레나의 이야기
남아프리카 모라비안교회 지도자 마그다레나의 이야기
-모라비안 선교사 슈미트가 심어 둔 배나무 아래서 계속적으로 예배를 드린 여인의 이야기-
글: J. A. 밀라드
<남아프리카 원주민들> <모라비안 선교사: 죠지 슈미트>
베헤트게(Vehettage), 또는 마그다레나(Magdalena)라는 이름은 세례 받을 때 선교사가 지어주었다. 베헤트게는 남아프리카의 초기 현지교회 리더들 중의 한 명이었다. 그녀는 게나덴달(Genadendal)에 있는 교회에 속해 있었다. 죠지 슈미트 선교사가 유럽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그녀는 선교사가 심어 둔 배나무 아래서 계속적으로 예배를 드렸다.
베헤트게는 18세기 초에 고이산(Khoisan)족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반유목민(semi-normadic)이었기에 리비에르존더렌드와 세르겐트강 지역을 옮겨 다니며 생활을 했다. 그녀는 1737년, 모라비안 선교사인 죠지 슈미트가 세르겐트강에 정착했을 때 처음 그를 만났다. 1738년, 죠지 슈미트 선교사는 바비안스크루프(나중에 게나덴달로 불리워짐)로 이주했고 베헤트게와 많은 사람들이 그와 함께 움직였다.
슈미트가 베헤트게를 만났을 때, 그녀는 이미 자네케와 결혼을 한 상태였다. 그녀의 남편은 슈미트 선교사가 새로운 미션 스테이션을 세우는 것을 도왔고 선교사역을 돕기 위해 군사우체국에 가고 소포를 가지고 오는 일 등을 도와주었다. 그는 또한 사냥꾼이어서 공동체에서 필요한 고기를 공급해주었다.
슈미트 선교사의 첫번째 사역은 학교를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고이산족 언어를 능숙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네델란드어로 가르쳤다. 그는 그가 가르친 학생 중 네 명의 최고의 학생에 대해 기록해주었다. 그 학생들의 이름은 아프리코 (첫번째로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음), 쿠피도, 윌렘과 베헤트게였다. 많은 학생들이 계속적으로 배우며 성장해나가길 원했고 그 당시 학교에는 4명의 남성, 2명의 여성과 2명의 어린이가 있었다.
반유목민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계속 정착해서 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자네케와 다른 이들은 때때로 몇 주 동안 계속해서 각자 그들의 방향대로 움직여갔다. 1739년 2월, 베헤트게는 자신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홀로 나아갈 것이라고 결심을 했다. 그녀는 슈미트 선교사에게 나아가서 “저는 더 이상 여기에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알렸다. 선교사인 슈미트가 그녀에게 “왜 그러십니까?”라고 묻자 그녀는 대답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반대해요.” 이때 슈미트는 그녀에게 그녀의 행동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해줬다. “그들이 당신에게 그렇게 대하는 것은 당신의 잘못된 행동 때문이라고 전에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이 말을 듣자 그녀의 ABC 책과 신약전서를 내던지고 사라져버렸다. 그렇지만 그녀는 5일만에 용서를 구하고 다시 돌아왔다.
슈미트는 임명 받은 사역자는 아니였다. 그러나 그는 사역 가운데 세례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들에게 세례를 주기 위해, 그는 모라비안 본부가 있는 헤른후트에 있는 진젠도르프에게 자신이 세례를 줄 수 있도록 허락을 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1742년, 세례 허락 편지가 도착했고 슈미트는 윌렘과 아프리코와 베헤트게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들에 세례를 받을 때 이들 각자에 세례명이 주어졌다. 그들의 세례명은 여호수아, 크리스천과 마그다레나였다. 베헤트게의 남편은 믿음 안에서 성숙이 되지 않아 세례를 받지 못했다.
1744년, 슈미트는 유럽으로 돌아왔고 다시 남아프리카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점차 아프리카에 있는 그 공동체는 사라져갔다. 크리스천과 여호수아(윌렘과 아프리코)는 1756년천연두에 전염되어 죽기까지 바비안스크루프에 남아있었다.
레나 혹은 마그다레나는 세르겐트 강에 있는 옛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슈미트 정원에 있는 배나무 아래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그들과 함께 기도하며 신약 성경을 읽어주었다. 가족들 안에 자녀들이 성장해 나갔고 자녀들에게 기도를 하도록 가르쳤다. 그 지역의 주민들은 이렇게 증언했다. ‘매일 저녁, 우리 모두(남성, 여성과 아이들)은 레나(나이가 듦)에게 갔습니다. 그때 그녀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신약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들이 슈미트 정원에 있는 배나무로부터 배를 따서 먹으면서 그들 가운데 있던 선교사인 슈미트를 기억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충분히 먹고도 남을 만큼 배나무가 그곳에 있었다.
<마드다레나가 읽던 성경책과 마드다레나가 성경을 읽고 있는 모습>
레나는 전설이 되었다. 1775년과 1776년에 유럽으로부터 온 여행객은 고이산족 여성이 기도하며 성경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1785년 슈미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도 계속적으로 성경을 가르쳤다. 모라비안 선교사인 쿠흐넬(Kühnel), 슈윈(Schwinn)과 마르스벨드(Marsveld)가 게나덴델에 미션스테이션을 다시 세우기 위해 도착했을 때, 레나는 그들과 만났고 그들에게 자신이 읽고 있던 네덜란드 신약성경을 보여주었다.
그때 레나의 눈은 나이가 들어 상태가 좋지 않아 주변에 있는 것도 보는 것이 어려웠다. 마르스벨드는 레나가 선교사를 후원을 하기 위해 방문을 했다는 것과 그녀가 학교에 있으면서 학습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을 도왔다고 자신의 저널에 기록해두었다.
2년 후, 레나는 독일에 있는 본부에 편지를 썼다. 그녀의 눈 상태가 좋지 않아 누군가 대신 써주어야했다. 1794년은 공동체 안에 전염병이 돌았다. 슈윈은 “세례 받은 네 명 중 세 사람이 너무 아파서 회복될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이들 중에 한명이 레나였다.”라고 기록했다. 감사하게도 레나는 회복되었고 회복된 것에 대해 감사하며 본부에 감사의 글을 다음과 같이 썼다. ‘선하시고 사랑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더 길게 살게 하셨다.’ 그녀는 자신이 회복된 것을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사인으로 보았다.
레나를 본 이들은 레나의 삶 속에서 ‘거룩함과 사랑’이 드러나고 그녀의 입술의 말에서는 ‘지혜와 정결함의 신성한 언어들’을 엿볼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레나는 점점 더 몸이 약해져 1800년 3월에 죽음을 맞이했다. 50년간 그녀는 게나덴달 교회의 리더로서 삶을 살았다.
기도제목:
- 모라비안 선교사인 죠지 슈미트로 인해 남아프리카 지역에 현지 교회가 세워져 그 공동체에 아름다운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이를 본받아 많은 이들이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자리에서 선교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소서
- 믿는 자들이 마그다레나와 같이 삶 속에서 주님을 갈망하며 주님의 거룩함과 사랑을 드러내는 순전한 주님의 사람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게 하소서
<Source: http://www.dacb.org/stories/southafrica/tikhuie_vmagdalena.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