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형제교회를 섬기는 권준 목사입니다. 오늘 SWM 연합 기도회에 말씀을 전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눅 10:36-37 말씀으로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눅 10:36-37,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시애틀형제교회를 섬기는 권준 목사입니다. 오늘 SWM 연합 기도회에 말씀을 전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눅 10:36-37 말씀으로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눅 10:36-37,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일어나야 할 사고의 전환은 바로 “나는 선교사다”라는 사실. 나는 선교사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세요. 요 20:21,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나님은 선교의 하나님이세요. 하나님은 보내시는 하나님이세요. 저와 여러분은 누구? 선교사로 보냄을 받은 사람.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것처럼, 우리 또한 이 세상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교사라는 사실. 이 사고의 전환이 필요. 저는 이것을 제2의 종교 개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선교’에 대해 내 안에 굳어진 고정관념이 있어요. 여러분은 ‘선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선교’는 무엇입니까? 선교하면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해하는 ‘선교’ 개념은 해외 선교입니다. 왜냐하면 ‘선교’를 말할때 우리는 선교의 대사명이라 일컫는 마 28:18-20의 말씀을 주로 나누는데 이 말씀에 대한 오해가 있어요.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을 강조? 가라는 단어. 이 단어는 교회가 선교 운동을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어요. 하지만 이 말씀에서 마태가 강조한 것은 ‘제자 삼으라.’ 가고, 세례를 주고, 가르치는 것은 동사가 아니라 보조분사입니다. 제자 삼기 위해서 가고 세례를 주고 가르치라는 것. 그런데 가라에 강조를 두다보니 해외로 가지 않으면 선교라 여기지 않는 것. 선교를 해외라는 지리적 이동으로 여겼어요. 선교를 지리적 이동으로 제한시켰어요. 선교는 지리적 경계와 상관없이 제자를 삼기 위해 행하는 모든 사역을 포괄하는 것. 지리적에서 복음을 받아 드려야 하는 사람으로 이동해야. 그래서 선교는 오히려 지리적으로 제한이 없어요.
제가 목회를 하면서 안타까울 때가 언제냐면 우리 성도들이 단기선교를 나가면 현지에서 선교사로 살아요. 그런데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면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선교사라는 정체성을 잊어 버리고 살아가요.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해서 이 켐패인을 하는 것. IM(I’m a missionary!) 나는 선교사라는 생각의 전환, 자각.
나는 오늘 보냄을 받은 삶의 현장에서 일상 생활에서 선교적 삶을 살아가는 IM이다. I am a missionary, 나는 선교사이다. 선교사는 어떻게 삽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사람. 이웃, 일상 생활속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들이 누구던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IM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 원리는 성육신의 원리. 성육신의 완성은 십자가. 십자가의 핵심은 섬김이요 함께 함.
오늘 본문인 눅 10장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우리가 잘 아는 내용. 그런데 핵심을 놓쳐요.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을 한 사람은 누구? 율법에 능통한,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 예수님이 대답합니다. 너가 율법학자 아니냐. 율법이 뭐라고 하느냐. 그가 대답을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대답합니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그러니까 이 사람은 자기가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보이려고 질문을, ‘그러면 누가 제 이웃입니까? 누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죽게 되었다. 마침 그때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가게 되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누구?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야 할 종교인. 그런데 반대방향으로 피하여 지나가는 것. 그렇다면 누가 이 사람을 도울 것인가?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킴. 제사장도 레위인도 피해 지나갔는데 사마리아인이 그를 보고 어떻게? 그를 불쌍히 여겨 아무 조건없이 쏟아 부어요. 자기 자신의 일과 이익을 잊어버리고 끝까지 쏟아 부어요. 예수님이 이 율법학자에게 질문을 합니다. ‘누가 강도 만나 자의 이웃이냐?’
율법학자는 내가 도와야 할 이웃은 누구냐고 질문을 했어요.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는 누구냐고?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이 사람의 이웃이냐고 묻고 있는 것. 이 율법학자는 사마리아인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긍휼을 베푼자라고 대답을 합니다. 왜? 그에게는 아직도 사마리아인을 증오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 비유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이 비유는 단순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비유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왜 율법학자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까? 이 율법학자는 사마리아인에 대한 긍휼이 없어요. 너의 마음이 바뀌어야.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이 무엇? 무조건적인 사랑.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는 순간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내게 이익이 될 사람인지 아닌지 모르는데도 주저하지 않고 베푸는 사랑을 말씀하세요. 여러분, 내가 누구였습니까? 강도만난 사람. 죽어가던 사람. 죄인. 도움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예요. 그런 나를 예수님이 찾아 오셨어요. 나를 찾아 오셔서 나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아무 조건없이 십자가에서 주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치루셨어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우리가 살게 되었어요. 세상과 다른 사랑. 이 사랑이 저와 여러분을 통해 흘러가야죠. 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이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 강도만난 사람은 죽어요. 생명을 잃어요. 영원한 생명을 잃어요. 이 사랑이 흘러가야.
나의 사명은 무엇? Mission? 나의 선교지는? 내가 섬겨야 하고 함께 해야 할 이웃은 누구? 먼저, 혹시 내 자신이 선교지는 아닙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없는 내 자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져야.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나의 선교지는 어디? 내가 섬겨야 하고 함께 해야 할 이웃은 누구? 내 가정? 남편, 아내, 자녀, 부모? 직장? 해외? 저에게 있어서 선교지는 형제 공동체. 형제교회가 저의 선교지.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교회로 오게 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소금이 녹고 빛이 스며들 듯이 내가 세상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하는 것. 그들과 나를 동일시 하고, 성육신하는 방식으로 소통해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선교사로 택하시고 나를 여기에 보내셨어요. 하나님의 은혜요 내게 주어진 특권. 감사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세상을 섬기는 선교사로 살아가게 되기를.
하나님,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