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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김진영선교사)

지극히 작은 자에게

swm 2015.03.16 03:36 조회 수 : 15

지극히 작은 자에게


지극히 작은 자에게

매거진 금향로 2015년 2월호

마태복음 25장 31-46절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재림하실 때에 영광의 보좌에 앉으사 모든 민족을 심판하시기를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복받을 자들은 창세로부터 예비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지만 저주 받은 자들은 사단과 악한 영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지옥의 불로 들어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양과 염소, 축복과 저주, 하나님의 나라와 지옥, 영생과 영벌의 기준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신학의 기본과는 다르게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소유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는 것이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는 믿음이라는 것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행위’가 영생과 영벌의 기준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물론 행위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영생을 소유한 성도들에게 절대적으로 있어야 하는 믿음의 열매 혹은 신앙의 삶에 대해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의 내용에서 세가지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 삶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야고보서 2:14-26에 의하면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선한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믿음’ 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그러나 다음 구절에는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하심이니라”(엡 2:10)라고 적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어떤 선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얻어진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 목적이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한 행위를 행하게 하려는 것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선한 행위가 마땅히 나타나지 않으면 그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최근 한국의 지난 30년 종교 통계자료(한국 갤럽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보고서’ 중앙일보 2015년 2월 3일)에 의하면 개신교의 종교활동 참여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1주일에 교회에 한번 이상 간다’고 답한 개신교인은 80%(1984-62%)이며 종교적 헌금에서 개신교의 십일조 이행률은  68%(1984-42%, 2004-46%)로 다른 종교보다 월등합니다. 

그러나 개신교의 열심과는 달리 호감도는 개신교는 10%(2004-12%)에 불과합니다. (참조: 불교-25%, 천주교-18%) 아예 무종교인으로서 종교에 전혀 호감이 없는 비율은 전체 인구가운데  48%에 달하고 있습니다. 

 개신교인의 종교적 열심과 십일조 이행율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지만 사회적 호감도가 가장 낮은 원인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개인 구원에 따른 은혜와 축복을 자신과 교회 안으로 제한하고 성도와 교회가 당연히 해야할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가치관이 결여되고 참여의식이 부족한 것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는 성도로서 우리의 사회적 책임과 의무, 나아가 지극히 작은 자들을 향한 선한 행위가 회복되고 더욱 많아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건의 삶은 지극히 작은 자를 돌아보는 것이 먼저요 그 다음 세상의 가치관과 영향력을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실천한 모든 선한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억하고 계신다 

의인들이 영생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기 위해 애쓴 것과 평소의 삶 가운데 행한 모든 선한 행위를 예수 그리스도는 다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난과 고난의 문제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것처럼 교만한 마음과 자세를 갖는 것도 문제이지만 우리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하여 어떤 시도도 하지 않고 그냥 방관하는 것은 책임회피에 따른 불성실과 불순종의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은혜와 축복을 주신 것은 우리의 것만으로 삼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축복과 은혜를 나누고 베풀라고 주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부르신 목적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주위 가운데 도움과 사랑을 베풀고 나누어 줄 수 있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우리에게는 감사와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에 대한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고 베품과 나눔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누고 베풀고 섬길 대상이 있음으로 인해 오히려 하늘의 축복과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느 때든지 누구에게든지 도울 수 있고 섬길 수 있는 건강, 물질, 은사가 있을 때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미룰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때는 항상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섬길 대상을 우리 스스로 제한하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한국 사람이기에 고통 중에 있는 북한 동족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더욱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한 민족만을 제자삼으라 하지 않고 모든 민족으로 제자삼으라고 주신 지상대명령이므로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 땅끝까지의 증인의 삶이 되리라는 지역과 민족을 초월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에게 베푼 선한 행위는 곧 예수 그리스도께 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중 예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며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사울은 한번도 주님을 직접 만난 적도 없고 주님을 핍박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핍박했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의 고통과 고난, 슬픔과 아픔이 곧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성도를 핍박하는 것은 곧 주님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을 곧 주님께 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보고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을 섬기고 대접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바로 지극히 작은 자를 찾아 그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풀고 섬기게 되는 것이 곧 주님께 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축복의 기회를 우리에게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는 것은 곧 우리에게 과연 믿음이 있는가를 테스트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또한 훗날 주님의 심판 때 우리의 믿음에서 비롯된 선한 행위에 따라서 영벌과 영생이 결정될 것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주님을 대접하고 섬길 수 있는 수많은 기회들을 놓쳤거나 순종하지 않았던 우리의 죄와 잘못을 회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전세계 가운데 수많은 난민들이 고통과 고난중에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라크와 시리아 전쟁으로 인하여 터키 동남부에 와있는 피난온 난민들을 향한 섬김의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섬김은 빵과 함께 복음을 나눔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흘려보내는 축복의 기회임을 믿습니다.  그들에게 빵과 복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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