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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하나됨


글: 방상용 목사(세리토스 선교교회 Cerritos Mission Church, 실크웨이브 선교회 운영이사) 


 

이번 2015 터키 아웃리치 킹덤비전트립을 통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7 교회와 갑바도기아에 있는 지하교회들, 터키 땅 전 지역에 퍼져 있었던 초대교회의 형태와 흔적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역사가 선교의 역사요 선교의 역사가 바로 교회의 역사임을 더욱 깊이 깨달았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이 생각이 납니다. “Mission exists because worship doesn’t.” 선교가 존재하는 것은 예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선교를 해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자들이 없고 교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초대 7 교회가 있었던 그 땅은 이제는 교회가 없는 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슬람권 선교의 첫 단계로서 성도들이 없는 곳에 가서 그 적막한 땅을 밟으며 기도하고 예배하라고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그 땅에 깃발을 꽂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 땅의 왕 되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의 첫 출발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는 정탐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마치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전에 정탐꾼을 보낸 것처럼, 그 땅이 어떤 땅이고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고 어떤 곡식과 열매가 나고, 그 땅의 사람들은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어떤 배경과 역사를 가졌는지를 보고 배워야 합니다. 


선교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한 채 선교지에 가서 무조건 전도하고 일하고 뭔가를 이루려고 하다가 선교를 망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현지의 언어와 문화도 모르고 역사도 모르면서 무조건 선교한다고 이런 일 저런 일 시작하다가 창피당하고, 또 거기서 오랫동안 두렵고 떨림으로 조심히 이루어 놓은 장기 사역자들의 일들을 방해하고 파괴하는 잘못된 단기 선교를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무엇을 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그 땅에 대해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고 하나님께 그 자리에서 예배부터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시록의 7 교회의 자리에서 배우고 겸손히 예배드리고 그 땅을 위해 중보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순교의 피를 뿌린 그 자리에서, 엄숙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의 신앙을 점검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땅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무슬림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배우고 품고 돌아왔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킹덤비전트립은 이슬람권을 향한 선교의 아주 작은 첫 발걸음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처음 시작되었던 그 거룩한 땅을 이제 마지막 때에 다시 밟으며 하나님께서 이 투르크창과 이슬람권에 복음의 문을 열어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일에 동참하는 기쁨을 허락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이 일을 혼자 하면 힘이 없습니다. 같이 해야 합니다. 힘을 모아야 합니다. 한 교회가 하는 것은 부족합니다. 여러 교회가 함께 하면 더욱 능력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권세입니다. 하나된 모습으로 우리가 연합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전 확신합니다. 우리 교회가 다른 교회들과 연합하여, 또한 사역자들과 연합하여, 터키에 있는 현지 교회들과 연합하여 하나된 모습으로 이슬람권의 가장 중심지인 터키 땅을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하면, 그 어둡고 황폐한 땅에 은혜의 비가 내리고 부흥의 바람이 놀랍게 불어와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슬람권의 선교를 뚫는 열쇠는 교회의 하나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하나됨을 통해 선교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선교할 때 교회의 하나됨은 더욱 견고해집니다. 이번 터키 아웃리치에 참석하니 같은 지역에 있으면서 서로 잘 만나지도 않고 교류가 없던 교회들이 선교지에 와서 만나 동역하게 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선교가 지역교회들을 하나로 묶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 퍼져 있는 여러 다른 교단의 한인 교회들이 함께 만나서 함께 교제하고, 함께 예배하고, 함께 찬양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동역하는 일이 선교지 아니면 또 있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비록 교회가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배경도 다르지만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19-22 말씀을 통해 우리가 왜 하나가 되었나 하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과거가 다 같습니다 


19절에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 때문에 우린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인 이민자들은 외인, 나그네, 이민자의 신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 입니다. 낯선 미국 땅에 가족을 데리고 와서 살아가려고 하니 앞이 캄캄하고, 고향이 그립고, 서럽고, 답답한 심정을 여러분들도 아실 것입니다. 


저는 이번 터키 아웃리치에 가서 그런 심정을 잠깐 경험했습니다. 우리 킹덤비전트립팀이 앙카라 쿠르트루쉬교회 담임 목사이신 터키인 이산 외즈벡 목사님을 만나고 그분의 귀한 간증도 듣고 기도제목도 나누고 같이 뜨겁게 기도하고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묵을 호텔로 가는데 김진영 목사님이 우리들에게 과제를 주셨습니다. 둘씩 짝을 지어서 교회에서 호텔까지 알아서 찾아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묻던지, 걷던지, 버스를 타던지, 알아서 호텔을 찾아와야 합니다. 단, 절대로 택시를 타고 오면 안됩니다. 그건 반칙입니다. 


그래서 저와 저희 교회 김승철 장로님이 짝이 되어서 찾아가는데, 앙카라 중심지이기 때문에 얼마나 사람들과 차가 많은지 마치 서울의 명동이나 종로길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계속 묻는데 아무도 영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말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대충 그쪽으로 가는 방향의 버스를 탔는데, 조금 가다가 기분이 이상해서 운전사 아저씨에게 물었더니 이 버스는 다른 쪽으로 가는 버스였습니다. 그래서 길 한 복판에서 내렸습니다. 그때부터 우린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스마트폰을 꺼내서 거기에 나온 지도를 가지고 보면서 가는데도 워낙 복잡해서 아무리 가도 가도 우리가 찾는 길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니까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두 자존심 강한 남자들이 길 찾기를 포기하고 결국 택시로 호텔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외인과 나그네의 신세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 경험을 했습니다. 잠깐이었지만 언어도 모르고 문화도 모르는 선교지에서 사역자들이 처음 이 땅에 도착해서 얼마나 외롭고 답답한 외인이요 나그네 신세를 지냈는가, 그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다 영적으로 외인과 나그네 된 자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들, 하나님에게서 멀리 있던 우리들, 하나님에게서 원수된 우리들이었지만, 그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값없이 받았습니다. 멀리 있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서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원수되었던 우리가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우리 모두의 공통적인 과거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디서 왔든지 상관없습니다. 내가 1.5세이든 2세이든 1세이든, 내가 미국 사람이든 히스패닉이든 흑인이든 상관없습니다. 내가 목사이든 장로이든 평신도이든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과거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즉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와 십자가로 하나님과 가까워졌고 화목하게 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하나가 되었나요?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세 가지 이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9절 하반절을 봅니다: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동일한 시민은 하늘나라의 시민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하나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한국시민보다, 미국시민보다 더 중요한 시민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외인이나 다른 민족이나 나그네나 다른 신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천국의 시민입니다. 


터키에서는 예수를 믿으면 집에서 버림당하고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갈 곳 없는 외인과 나그네 신세가 됩니다. 즉 예수를 믿게 되면 이 세상에서 버림을 받습니다. 한 예로, 이번 아웃리치에 베델교회의 남성 중창팀이 부르사 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릴 때, 한 10살 소녀가 기도를 했는데 로냐라는 그 소녀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친척들에게 외면당하고 친구, 선생님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로냐는 우리의 딸이요 자매입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가 비록 지금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외인이요 나그네 같은 취급을 당하고 있지만 우리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서 이제는 동일한 천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 동족이 되었습니다. 비록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지만 그리스도를 모르는 어느 한국 사람보다 로냐는 더욱 가깝고 친밀한 나의 동일한 천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사도바울이 주는 두 번째 이미지는 권속입니다 


즉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삶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는 가족입니다. 이 세상 인간관계 중 가장 가까운 관계는 가족 관계일 것입니다. 가족은 허물이 없습니다. 가족은 서로의 허물을 너무도 잘 압니다. 그래서 가족에게는 숨길 것이 없고 숨길 수도 없습니다. 가족이란 항상 함께 있고, 함께 먹고, 함께 마시고,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사이입니다. 우리가 방문한 지역 중 하나가 갑바도기아라는 곳인데, 성경 베드로전서 1장에 나오는 지역입니다. 1장 1절에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베드로전서는 이 전 지역에 흩어져 있었던 핍박 받는 성도들을 위해 쓴 서신입니다. 


갑바도기아에는 사람들이 만든 지하도시들이 많았습니다. 그곳에서 초대교회 첫 300년 동안 많은 성도들이 로마제국의 핍박을 피해 지하로 내려가 살게 됩니다. 거기에서 완전히 공동생활을 합니다. 매일 같이 먹고, 같이 예배드리고, 같이 친교하며, 같이 살았습니다. 그 지하동굴은 진정으로 하나된 모습으로 살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같이 주일날 한 시간만 같이 예배드리고 점심 먹고 가서 일주일 동안 연락도 안 하는 그런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공동체는 완전히 하나된 성경적인 공동체였습니다. 그래서 서로 간에 아주 깊은 친교가 있었습니다. 성도들의 공동체 안에 깊게 들어가 살게 됩니다. 얼마나 깊게 들어갔을까요? 개인적으로 붙잡아 줍니다. 완전히 투명한 가족같이 삽니다. 그 지하공동체 안에는 사람을 매달아 놓고 때리는 공공장소도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가 자녀를 징계하는 것 같이 완전히 가족같이 서로의 죄를 다루었습니다. 같이 일하고, 같이 놀고, 서로의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했습니다. 그 지하공동체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각자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서로 위탁하고 함께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세번째 이미지는 


성전의 이미지입니다 


20절을 보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성령이 거하실 성전의 돌들이라고 했습니다. 가까운 것이 아니라 아예 내 안에 거주합니다. 이것보다 더 가까운 사이는 없습니다. 


세 가지 이미지를 다시 한번 정리해 봅니다. 시민, 가족, 성전. 이 세 가지 이미지는 놀랍게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점점 더욱 강하고 깊은 관계로 진전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은 그 백성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왕과 백성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왕과 백성 사이는 가깝고도 먼 사이일 수 있습니다. 


또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있습니다. 한 지붕 밑에서 온 가족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 관계는 왕과 백성의 관계보다 더욱 가깝습니다. 그러나 성전 안에는 하나님께서 거하십니다. 성전 주위를 맴도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계십니다. 이것보다 더 가까운 관계는 없습니다. 이렇게 점진적으로 친밀해지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세 이미지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뿐 아니라 그 안에 속한 우리 서로간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한 나라의 동일한 시민은 같은 문화권으로서 가까울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먼 사이입니다. 같은 동족은 가까운 사이입니다. 그러나 가족 같이 가깝지는 않습니다. 가족은 한 지붕 밑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주 가까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있습니다. 바로 성전의 돌들입니다. 성전의 돌은 옆에 있는 다른 돌과 시멘트로 다 붙어버렸습니다. 관계 면에서 거리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바울은 이 세 가지 이미지를 가지고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같은 나라의 동족보다 더욱 가까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가족이요 또한 가족보다 더욱 가까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이 마음 속에 세워지고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가 된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나라의 민족성 보다, 나의 어머니/아버지/형제/자매의 관계보다 더욱 강하고 깊은 복음의 능력이 있습니다. 비록 이름도 잘 모르고 배경도 모르지만, 터키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영접했다는 이유로 친척에게서 외면당하고 친구들로부터 버림받은 부르사 교회의 로냐와 제가 복음 때문에 더욱 깊고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저의 새로운 정체성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닌 천국 시민이요, 가족이요 성전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외인과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외인과 나그네 되어 있는 자들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12장 13절에 보면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헬라어로 이 단어는 두 개의 단어, 즉 ‘낯선 자를 사랑하는 것’과 ‘모르는 사람을 극진히 대접하고 끌어안고 사랑하는 것’ 입니다. 우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손 대접을 받은 자들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실 때 그 분은 집 없는 분이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죽으실 때에도 버려지고 외면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하나님의 가장 귀한 권속이신 예수께서 완전히 극치의 외인이요 나그네 신세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문 밖 어둡고 추운데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밖으로 내 버려짐으로 인하여 외인이요 나그네 된 우리들이 하나님의 권속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손 대접의 은혜를 받은 우리들이 이제부터 내 주위에 있는 외인이요 나그네 된 인생들을 끌어안고 하나님의 가족 안으로 들어오도록 대접을 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나와 문화적으로 배경은 다르지만, 십자가의 피로서 하나된 우리 형제, 자매들을 서로 끌어안고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아직도 죄와 허물로 멀어진 수많은 이슬람권의 영혼들이 우리와 같이 동일한 시민이 되고, 가족이 되고,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갈 때까지 십자가의 사랑으로 그들을 끌어안고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임을 믿으며 우리의 하나됨을 힘써 지켜 나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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