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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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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스 할머니(2)

글: 이세웅 실행총무

키이스 할머니의 아버지 남대리(Leroy Tate Newland 1885-1969) 선교사는 아이오와 주 갈바에서 아버지 제임스와 어머니 페니로잘리아 마리아 사이에 태어났다. 


10대에 은혜를 받고 이미 선교에 헌신한 키이스의 어머니 사라는 선교사로 나갈 남편감을 찾던 중 결혼을 청해온 뉴랜드를 보고 당신은 선교를 할 사람이 아니니 내 남편이 될 수 없다는 말로 거절하게 된다. 그 후 데이빗슨 대학교에 찾아온 중국 선교사의 도전을 받은 뉴랜드는 은혜를 받고 선교를 결심하게 된다. 하지만 선교지는 중국이 아닌 조선으로 결정한다. 

윌밍톤남장로회에서 안수를 받고 1911년 6월 12일 젊은 신혼부부는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결혼 후 1달 만에 미국을 떠나게 된다. 조선에 도착한 1911년부터 1939년까지 르로이테이트뉴랜드 선교사(당시 26세)는 남대리 선교사라는 한국이름으로 조선 사역을 감당한다. 또한 조선 선교사 중에 가장 나이가 젊은 사라(Sarah Louise Andrews, 1891-1981, 당시 20세) 선교사는 ‘남부인’이라는 한국이름으로 불리며 1911년 광주와 목포지방에서 30개의 가정 교회를 개척하고 학교와 병원을 세워 지역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킨다. 남대리 선교사가 조선을 떠날 때는 120개의 교회가 되었다.

남대리 선교사와 남부인의 사역은 세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1911년 – 1914년은 첫 사역지인 광주에서, 1914년 – 1918년은 목포에서 그리고 1918년부터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1939년까지는 다시 광주에서 그들의 사역을 담당하게 된다. 1926년 안식년을 맞아 남대리 선교사는 버지니아 리치몬드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게 되며 이 기간을 제외하고는 남대리 선교사 가정은 일곱 자녀와 함께 조선 사역을 감당했다. 

일본의 침략전쟁이 점점 심해지는 과정에서 일본은 천황숭배를 내세워 모든 조선인들을 핍박했다. 특히 교회를 핍박하였는데 이 일에 강하게 맞서서 천황을 숭배해서는 안된다며 남대리 선교사 부부는 자신들이 개척한 30개의 교회지도자들에게 신앙을 지킬 것을 강하게 권유하였다. 

남부인인 사라 선교사가 이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자 일본 경찰은 남부인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고 한다. 1939년 원하지 않게 미국으로 돌아오게 된 남대리 선교사는 1941년부터 1954년까지 조지아 주 유니온 포인트에서 작은 교회들을 섬기게 된다. 그 후 노스캐롤라이나의브로잉록의럼플 장로교회에서 1954년 – 1957년까지 섬기고 1957년 72세의 나이로 은퇴하게 된다. 

1957년 은퇴를 한 후 윌리엄힐 목사가 창립한 장로교 전도협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다가 1969년 84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품으로 가게 된다.

뉴랜드 선교사 서거 20주년 기념식에서 둘째 딸인 사라 볼튼 런스포드는 다음과 같이 아버지를 기억하였다:

르로이테이트뉴랜드는 조선 선교사였으며 일곱 자녀의 아버지였고 정말 많은 은사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중략...

그는 단순하며 사랑을 잘 표현하고 늘 유머와 익살로 자녀들을 기쁘게 해 주었습니다. 가장 잊을 수 없는 추억은 광주의 무등산에 작은 오두막을 지어놓고 매해 여름마다 가족이 그 곳으로 휴가를 간 것이었습니다. 그 오두막으로 가는 길은 꽤나 멀었는데 아버지는 일곱 아이들이 물어보는 풀과 나무의 이름들을 일일이 가르쳐 주며 그 길을 올라가곤 했습니다. 또 음이 맞지 않아도 아버지가 시작하시는 찬송가를 부르며 우리들은 무등산을 올라가곤 했습니다. 십 수년 동안 아버지는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로 시작되는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의 근황과 사랑의 마음을 전해주셨습니다. 아버지가 하나님께 돌아가신 후에도 이것을 통해 우리 가족은 하나로 끈끈하게 이어져 갈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은사 중에 뛰어난 것은 시에 대한 사랑과 표현능력이었습니다. 그는 수백 편의 시를 쓰셨는데 – 그것은 우리 일곱 자녀들과 어머니의 생일마다 써 주신 것 들이었습니다. 노년에는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위해 매일 아침식사를 준비해서 쟁반에 받쳐가지고 가져다 주신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몇 년 동안은 자신의 고뇌와 사역 그리고 자신의 무가치함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자기를 구원하신 놀라운 사랑에 대하여 많이 글을 쓰셨습니다. 수백 편의 시를 쓰셨는데 그 중에 일부가 한 권의 시집으로 편찬되었습니다.

키이스 할머니는 아버지와 멀리 떨어진 미시시피에 정착하였다. 키이스 할머니의 자녀들인 첫째 아들 켄트 판사, 둘째 딸 캐롤 그리고 농장주인인 막내아들 커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할아버지와할머니는 여름에 미시시피를 방문하시곤 하셨습니다. 할아버지가 계신 방에서는 아침 일찍 그리고 어떨 때에는 저녁시간에도 성경을 읽으시는 소리가 났습니다. 우리들은 늘 조용히 했어야 했지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우리 집을 방문하시면 우리 세 남매는 식사 후마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30년을 조선에서 계시다 오셔서 그런지 식사 후에는 크게 트림을 하셨습니다. 냄새도 냄새지만 어떻게 미국인 할아버지가 식사 후에 트림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하지만 할어버지는 그렇게 하셔야 속이 시원하다고 하시니 우리는 늘 할아버지가 트림을 하시면 도망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늘 유쾌하셨지만 단호한 분이기도 하셨습니다. 할머니께서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높은 톤으로 헛기침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러면 긴장했습니다. 누군가가 잘못한 것이다 그런 뜻이었기 때문이었지요. 할머니는 강인하셨고 기준을 늘 지키시며 또 가족들도 그 기준을 지키기를 원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어머니셨고 엄격한 분이셨어요. 

첫째 아들인 켄트 판사는 ‘Godly Judge’ 라고 소문이 난 공의로운 재판관이라고 합니다. 큰 고모가 중국 선교사이어서 그런지 중국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저희 할아버지가 100년 전에 조선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100년이 지난 지금, 그 때 복음을 전해 받은 한국인들이 미국으로 찾아와서 감사하다고 하는 것을 보니 놀랐습니다. 한국과 캘리포니아에서 방문해 준 당신 두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시며 언약의 하나님이신지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켄트 판사는 장로로서 잭슨장로교회를 오랫동안 섬기고 있다. 한국에서 지금은 세계를 향하여 선교사를 내보내는 나라가 되었다고 말해 주었더니 중국에도 혹시 한인선교사들이 있느냐고 물었다. 5천 명에서 8천 명의 한인선교사들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하니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 ‘God of Covenant’라고 계속 중얼거리며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긍휼을 찬송하였다.

아직은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기념하는 책을 만들지 못한 키이스 할머니와 자녀들은 우리 가족이 80년 전에 하나님께로 가신 나의 외할아버지 김좌순 조사의 신앙을 이어받기 위해 미국까지 와서 인터뷰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들도 신앙의 유산을 다음 세대에 잘 이어주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면서 다시 한번 먼 길을 찾아와서 어머니를 위로하고 감사의 표시를 해준 우리 두 사람에게 뜨거운 마음을 전하였다.

1911년 5월 미국에서 갓 결혼한 신혼부부로 저 먼 땅 조선으로 찾아와 천국 복음을 전해준 남대리 선교사와 남부인을 생각한다. 2014년 터키를 방문하면서 복음의 빚진 것을 갚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여러 도시들과 골짜기들을 찾아갔다. 지금 우리가 중보기도하는 터키 성도들이 또 언젠가는 투르크창과이슬람권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하여 복음을 들고 나아갈 것을 굳게 믿고 있다.

복음의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몸 된 교회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날마다 흥왕하여 질 것이다. 그 언젠가 우리 모두가 하나님과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의 앞에 서서 놀라운 일들을 볼 것이다. 생명의 부활로 긍휼하심을 입고 나아가 주님을 함께 찬양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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